
최근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 충돌을 비롯한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한 원료 수급 대란이 국내 인쇄 및 패키징 업계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거시적인 국제 분쟁이 인쇄업계의 필수 부자재인 코팅 필름, 인쇄물 포장용 비닐 랩, 박스 테이프 등의 수급 대란이라는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원료 가격 2배 폭등 속 ‘공급 절벽’ 직면, 멈춰 서는 제조 현장
실제 비닐과 플라스틱 인쇄물을 취급하고 있는 업체들이 현장에 체감하고 있는 상황은 훨씬 어려움이 크다. 서울 방산시장에서 20년째 공업용·농업용 PE필름 및 하이덴필름 전문기업 ‘방산비니루포장상사’를 운영 중인 김동진 대표는 지금의 사태를 ‘코로나19 때보다 더 심각한 최악의 위기’라고 설명했다. 과거 코로나19 확산 시기에는 배달업 관련 수요가 폭증하며 오히려 비닐봉투 등의 의존도와 수요가 높아졌고 원료 수급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던 반면, 현재는 웃돈을 주더라도 물건 자체를 구할 수 없는 ‘공급 절벽’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비닐과 필름의 핵심 원재료인 나프타 공급망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김 대표에 따르면, 중동전쟁 이전 1톤에 130만~135만 원 선이던 원료 단가는 3월 초부터 인상되기 시작해서 4월 초 현재 290만~300만 원까지 2배 넘게 폭등했다.더 큰 문제는 좁아진 수급량이다. 경기 곤지암에 위치한 김 대표의 공장은 평소 월 250~300톤의 원료를 소화해 왔으나, 3월에는 불과 80톤을 수급받는 데 그쳤다. 원료 조절을 위해 주 5일 가동하던 공장을 주 4일로 축소해 운영 중이며, 소규모 비닐 공장 중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아예 한 달 이상 가동을 멈춘 곳도 속출하고 있다. 원료를 공급하는 대기업 측에서는 4월까지는 원료 공급을 보장했지만 5월부터는 원료 공급에 대한 별다른 기약이 없는 상태이다.

연쇄 마비 우려, 종이·친환경 대체도 비용 부담에 한계
이러한 공급망 붕괴는 인쇄 공정 전반과 연관 산업의 더 큰 어려움을 예고하고 있다.
출판인쇄물이나 명함, 카탈로그 표지 등에 쓰이는 코팅 및 라미네이팅 필름은 물론, 최종 인쇄물 납품 시 필수적인 비닐 랩 수급도 극히 어려워질 전망이다.비닐 의존도가 높은 소비재 및 소매점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제과점의 빵 포장 비닐이나 다이소 등에서 사용하는 포장용 OPP 필름도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종이로 대체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으나, 장당 10원 수준이던 비닐을 100~120원짜리 종이로 바꾸기에는 원가 부담이 지나치게 커 현실성이 떨어진다. 생분해성 친환경 비닐 또한 일반 비닐 대비 가격이 3배가량 비싸 실질적인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등 타국 원료로의 선회 역시, 국내 대기업의 정제 설비가 중동산 원유에 최적화되어 있어 설비의 전면 교체 없이는 도입이 불가능한 한계를 안고 있다.
유가 회복에 최소 3~5년, 인쇄물 원가 구조 정비와 체질 개선 등 자구책 절실

이번 중동사태 장기화에 대한 우려는 업계 관계자들의 한숨을 깊어지게 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쟁이 조기 종전되거나 휴전에 들어가더라도 국제 유가는 당분간 배럴당 약 90달러 수준을 고공 비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핵심 에너지 시설의 피해가 극심해 카타르 LNG 시설 복구에만 3~5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 유가가 하락하더라도 비닐 단가는 1~2년에 걸쳐 서서히 톤당 30만~40만 원씩 인하되는 구조적 특성이 있어 당분간 지금의 고단가 기조는 굳어질 공산이 크다.이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위기 속에서 김동진 대표는 자체적인 마진을 줄이고 거래처에 20~30% 수준의 최소한의 인상률만 적용하는 한편 ,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 도매 위주의 오프라인 영업을 넘어 스마트스토어나 카페24 등 자체 쇼핑몰을 구축하고 블로그 마케팅을 전개하는 등 온라인 B2B 판로 다각화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반면, 종이 인쇄를 위주로 하는 영세 인쇄업체들의 상황은 더욱 가혹하다. 치열한 단가 경쟁으로 인해, 이번 사태로 촉발된 부자재 인상 요인을 고스란히 스스로 떠안으며 출혈을 감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중동의 전운이 국내 인쇄·포장 업계 전반에 또 하나의 생존 위기를 던져주고 있는 상황에서, 원가 절감 노력과 인쇄 단가 현실화, 그리고 다각화된 생존 전략 수립은 이제 대한민국 인쇄업계가 마주한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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