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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계2014.08] Memorial-오세웅 교수

_NEWS_/종합

by 월간인쇄계 2014. 10. 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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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산업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쇄인, 오세웅 교수


젊은 인쇄인에게 ‘고기를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헌신해온 삶을 기억’하며 삼가 이 글을 영전에 바칩니다.


인쇄전문인의 요람, 서울공고 인쇄과
오세웅교수와 만남은 1970년대 말 서울공고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다. 3학년 반장인 오 교수의 별명은 오랑우탄으로 운동으로 단련된 탄탄하고 강한 카리스마에 붙여진 닉네임이었다. 대부분 실업계에 진학한 학생의 경우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보다 빨리 사회에 진출하여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진학한 경우가 많다. 오 교수 역시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하여 어린 나이에 자취를 하며 인쇄인의 꿈을 키워갔다.
당시 한국에 유일한 인쇄전문 교육기관이었던 서울공고 인쇄과의 설비는 활판인쇄기와 미국의 원조로 도입된 단색 소형오프셋인쇄기 등이 고작인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은사님들의 헌신적인 교육에 힘입어 인쇄산업 및 연관 업계에 진출하여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주경야독의 고독한 젊은 시절
삼화왕관(주류 등의 병뚜껑에 세금인지를 금속인쇄하는 업체)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오 교수는 학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대학 조교 등으로 학비를 충당하며, 인하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인천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동 대학원 박사과정(분석화학 전공)을 졸업하였다.
비록 인쇄전공 학사나 석사, 박사과정이 없었던 시기라서 화학을 전공을 하였으나, 어느 한때도 인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병역의 의무인 군생활 역시 삼군사령부 제8지구 인쇄소에서 복무를 하며, 당시 사회에 비해 다소 미흡한 인쇄행정, 관리, 기술개선, 인쇄전문지식이 없는 신입병사에 대한 교육 등에 노력하며 전역을 하였다.
 


교육자와 실무자의 길
오세웅 교수는 춥고 배고프다는 오랜 강사생활과 가정을 꾸린 가장으로서 인고의 시기를 견뎌내고, 신구대학의 인쇄과 설립에 따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인쇄 커리큘럼을 마련하면서도 실무를 바탕으로 구성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선생이 모르면서 어떻게 제자를 지도하고, 학생은 무엇을 배우겠냐며, 절대 비밀로 해달라며 방학이면 야간무료근무를 자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일을 하며 현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도 하였다.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고가의 인쇄기자재는 학교에서 다른 과와 형평성 등을 고려하여 쉽게 도입이 어렵다. ’80-’90년대 10여 년간 인쇄기술은 과거 100년에 거쳐 발전한 것보다 더 많은 진보를 한 시기이다. 디자인에서는 사식에서 DTP로, 수십 명의 기술자가 사진적인 방법을 이용한 제판필름 제작은 컴퓨터를 이용한 편집과 이미지세터, 플레이트세터로 필름이나 인쇄판을 직접 생산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격동기였다.
새로운 기술을 인쇄현장과 교육기관에 정착시키고, 전파하기 위해서는 인쇄전문서적의 제작이 필요했고 오세웅 교수, 정호균 교수와 함께 Digital Graphic Arts(디자인, 인쇄, 출판가이드) 1,2권을 제작하였다. 본인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강직한 오세웅 교수이지만 업계를 위한 일이기에 한국제지의 김광석 본부장께 인쇄용지를 부탁해서 얻고, 각 기자재 메이커의 광고로 경비를 충당 받아 서적을 출판할 수 있었다. 제3권 인쇄표준화에 대한 집필 원고는 이제 유고(遺稿)가 되었다.
필자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상급학교 진학을 권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더 이상 학교에서 인쇄를 배울 필요가 없다며, 벤저민 프랭클린이 무학이지만 인쇄인으로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만들지 않았냐며 피해갔었다.
오 교수는 학자의 길을 가면서도 스스로 인쇄기술자이기를 원했고, 필자는 현장중심의 실무자이면서 이론의 중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직원과 인쇄기술자 후배를 위한 노력을 하게 된 것은 오세웅 교수의 몸으로 보여준 솔선수범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진정한 산학협력을 위한 노력
인쇄현장에는 정규인쇄교육과정을 이수한 인력보다 현장에 투입되어 몸으로 익힌 기술자가 많고 인쇄경영자도 그런 과정을 거친 분들이 대다수인 것이 한국 인쇄산업의 현실이다. 아무리 실무적으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론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인쇄산업이 변화하는 환경과 기술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가장 절실한 것이 경영자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인식하여 경영자를 위한 강좌의 개설, 서울인쇄센터에서 실시하는 경영자의 새벽강의, 실무자를 위한 강좌에 언제나 흔쾌히 도움을 주셨다. 사실 목표는 학교에서 도입하기 어려운 기자재를 단체, 업체의 지원으로 설비를 갖추면 학생들이 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실무학습이 가능하고, 학교의 교수들을 초빙하여 사업체 지근거리에서 정규과정이수를 통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인쇄표준화에 대해서도 남다른 열정으로 미국의 G7 전문가 인증 등에 참여하고, 한국인쇄현장에서 접목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젊은 후학들과 같은 조건으로 교육에 참여하고 호흡하며 새로운 기술에 대한 도전에는 현직 교수이며 박사인 체면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업체 컨설팅을 나갈 때면 현장의 실무자는 이론을 연구하는 교수가 무엇을 알겠냐며 반신반의하다가도 현장의 어려움을 족집게처럼 찾아내서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에 업계에서 인정받는 교수 중 한 분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인쇄기술을 해외로
우리나라에서는 해외원조전담기구인 국제협력단(KOICA)를 통해 신흥국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지원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 인쇄분야는 수원국에 대한 교과서 제작 지원 사업이 실시되고 있다. 사회기반기설이 미흡한 신생국의 경우 교육에 대한 지출을 할 수가 없어 문맹율이 높고 빈곤을 대물림하게 된다.
‘동티모르 떼툼어 교과서 제작사업’은 명지대와 신구대가 국제협력단의 지원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이고, 오교수가 인쇄분야 책임자로서 참여하여 ‘동티모르 국립 인쇄센터’의 설립 및 교과서의 자국 내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동티모르의 치안불안 등 현지사정으로 인해 잦은 공사 중단이 발생하여 인쇄공장 건설과 인쇄 장비의 설치, 교육을 병행하며 예정된 납기에 교과서를 생산해내야 하는 과제는 애초에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한국에서 교육을 실시한 현지기술자는 오랜 대기상태로 그동안 습득한 기술을 잊어버리고, 정부는 인쇄센터를 운영할 주체도 설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고, 전기공급도 이루어지지 못해 발전기를 이용해 인쇄기 및 제본장비를 가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오 교수는 공장건설공사의 지연, 정확하게 설치되지 못한 일부장비의 잦은 고장, 공무원이지만 정부로부터 급여를 받지 못해 식대도 없는 직원들에게 사비를 털어 도시락을 지급하면서도 교과서 생산을 주도해나갔다.



하지만 그로 인한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는 오 교수의 건강악화로 이어져 급성이질에 감염, 체중이 10kg이상 감소되게 된다. 하지만 귀국을 권해도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2012년 9월 동티모르대통령과 서경석 대사 등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인쇄센터의 개소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동티모르는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450년을 지낸 신생독립국으로 내전을 겪으며, 우리의 평화유지군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인구 100만 명의 작은 섬나라 동티모르는 세계 최빈국이다. 학교는 있지만 학생이 배울 교과서가 없어서 선생님이 칠판에 필기한 내용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열악한 교육환경에 처해 있다. 그런 최빈국 동티모르에 인쇄센터가 설립되고 자국에서 생산한 교과서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향후 국가발전에 있어 매우 획기적인 진보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인쇄 장비는 유지관리가 중요한데 정부예산의 미비로 새로운 학년의 교과서 생산이 원활하지 못하고 있다. 동티모르정부의 교과서 편집능력, 인쇄전문가의 양성, 인쇄용지, 잉크 등의 자재 구매능력이 없어 지속적인 원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다고, 프로젝트가 종료된 이후에도 오 교수는 매우 가슴 아파했다. 이에 오 교수는 프로젝트 수행 중 하나라도 더 전문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인쇄매뉴얼의 현지어 번역제작,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현재는 인쇄 전문가인 최찬묵 자문관만 홀로남아 인쇄센터의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국제협력단에서도 대형 프로젝트인 교과서 제작 지원사업은 인쇄공장 건설에서 장비 및 자재공급, 인쇄물 제작능력 부여, 성과물의 제시 등 광범위한 범위로 진행된 첫 사업으로 시행착오와 난관이 많았다.
온갖 고난 속에서 문을 연 동티모르 인쇄센터에서는 모든 직원이 오 교수의 갑작스러운 별세소식에 애도의 날을 갖고 그를 추모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그들은 아직도 하루에 두 번 출퇴근을 한다. 식당이 없어서 집에 귀가하여 점심을 먹고 다시 출근을 하지만 차비가 없고 집에 먹을 것이 변변치 않기 때문에 굶기가 다반사이다. 언젠가는 오 교수님과 솥단지 사들고 가서 식당을 만들어 주고, 상품 가치는 없지만 사용할 수 있는 버려지는 인쇄용지라도 얻어서 컨테이너에 싣고 가자고 했는데 못다 이룬 약속이 되었다.
오 교수와 함께 수행한 동티모르의 인쇄지원사업에서 축적된 경험은 민간사업으로 몽골과 인쇄협력 및 기술지원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국과 교류가 전무한 상태에서 인쇄 및 제본장비, 인쇄용지, 잉크의 수출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 생산해오던 교과서도 전량 몽골에서 몽골기술자에 의해 제작되고 있다. 몽골은 거대시장 중국을 향한 미래를 대비한 생산전진 기지로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우수한 젊은 인력을 활용한 준비로 신구대학과 울란바토르 기술대학의 교류, 전문인력의 양성교육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다. 신구대의 지원으로 실시한 인쇄전문가 교육, 몽골어로 된 인쇄교육자료 지원 프로젝트는 한국과 몽골 인쇄산업의 초석이 될 것으로 믿는다.


 

진정한 인쇄인 오세웅 교수
가장을 잃은 가족을 비롯해 인쇄업계의 많은 동료와 후배, 제자들이 오 교수의 믿어지지 않는 갑작스러운 별세에 애통해하고 있다.
10대에서 5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같은 길을 걸어오며, 항상 이끌어주시던 오세웅 교수의 비보를 접한 이곳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한동안 충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동티모르에서 몽골까지 3년간의 긴 해외 기술전수 작업을 마무리하고 귀국을 앞둔 시점에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사고와 문화가 다른 이국 땅에서 한국인쇄의 우수한 기술을 전달하고 과거 발전도상에서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를 하나라도 줄여주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고민과 갈등조차도 아름답고 행복했던 날들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기러기 아빠를 감수하며 자녀들을 훌륭하게 성장시키고 맡은 바 직무에 항상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 짧은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가 보여준 인쇄에 대한 열정과 새로움에 대한 도전정신, 무엇보다 우리나라 인쇄를 사랑한 진정한 인쇄인 오세웅 교수의 정신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기원한다.


글_신익재 몽골 웅거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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