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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계2023.10] 글자와 관련된 다양한 작업들을 통해서 좋은 방향으로 풍성하게 만들어 나갈 것 - 심우진 타입 디렉터

_인터뷰_/Fonts & People

by 월간인쇄계 2024. 1. 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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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_심우진 타입 디렉터]

타입 디렉터라는 직함이 생소합니다.

타이포그라피가 아무래도 꼼꼼하게 일을 해야하다보니 강한 장인정신을 지닌 분이 많아요. 

그 중에서도 타입디자이너는 폰트 자체의 완성도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아요. 타입 디렉터는 폰트에 대한 컨설팅부터 컨셉을 만들고 마케팅, 브랜딩까지 전반적인 매니지먼트 역할을 맡아요. 특히 많이 기업 전용 폰트를 만들 때는 고려해야할 요소가 많기 때문에 타입 디렉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죠.

‘산돌 정체’ 작업에 대한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한반도도 유구한 활판술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타이포그라피라는 서양 기술이 들어온 건 비교적 최근입니다. 그것도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혼란스럽던 20세기에 일본을 거쳐서 왔기 때문에 각종 개념과 이론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정서에 맞는 타이포그래피를 생각할 때도 됐습니다. 서구식과 가장 맞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여러 폰트를 섞어 쓰는 거에요. 서양의 미니멀한 타이포그래피와는 미학적으로 반대죠. 저도 그런 타이포그래피 교육을 받았구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특히 동아시아의 흥은 여럿이 모여서 흥겹게 노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뭘 하나 만들어도 쓰는 폰트가 많아요. 물론 미니멀한 것도 좋지만 어우러져 놀고 싶다면 그럴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러려면 기존 라틴 폰트의 웨이트 중심의 패밀리 구성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스타일 파생이 가능한 패밀리가 필요합니다. 

▲ [이미지 제공_심우진 타입 디렉터]

가족을 아우르는 개념이 필요하니 가문이라고 하자고 해서 이런 가문의 족보를 「산돌 정체—다시 기본으로」 발표회(2019년 5월 15일)에서 발표했죠. 한 가족이 있고 옆에 얘네들끼리 정체성이 어느 정도는 유지되는 친척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폰트 이름도 숫자 세자리로 되어있어요. 첫 번째 자리가 스타일, 두 번째 자리가 굵기(웨이트), 세 번째 자리가 너비입니다.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 530, 630이구요 다음 해에 730, 830을, 그 다음에 930, 030을 개발했어요. 전체를 다 개발하려면 수십년이 걸리는 거대한 프로젝트죠. 처음부터 제가 완성하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지금은 산돌을 떠났지만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 남은 분들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해 두었습니다. 저는 개념과 유형을 만드는 디자인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가문도 그런 의미에서는 큰 고비를 넘은 프로젝트입니다.

개념을 확장해서 더욱 풍성하게 폰트를 즐기는 토대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기업 전용 폰트와 같은 무료 폰트들이 시장의 파이를 키우고 성장하게 하는 건 맞지만, 무료 폰트가 많아지면서 유료 폰트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이건 어떻게 보면 되게 예민한 얘기인데요,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면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이 있어요. 

유료 폰트와 무료 폰트의 정의인데요, 넉 자 중 두 자가 같으니 굉장히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상품군이 다릅니다. 물론 같은 폰트지만 시장에서 포지션이 다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서로를 위협하는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거예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무료 폰트는 대부분 1종 짜리에요. 웨이트가 있다고 해도 많아야 3종이죠. 이 규모로도 일반적인 것은 할 수 있지만 명확한 한계가 있어요. 웨이트가 적으면 다양한 스타일을 연출할 때 한계가 있어요. 대부분 굵기 차이로 스타일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부분 산세리프이고 다국어에 취약하고 오픈타입 피쳐도 지원하지 않은 경우가 많죠. 결국 일반인들이 즐겁게 쓸 수 있는 정도의 상품성만 갖춘 거에요. 덕분에 여러가지 폰트를 쓰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만든 촉매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이런 경험으로 여러 폰트를 쓰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게 된 겁니다. 폰트를 돈 주고 사서 쓰면 바보 소리를 듣던 때가 있었어요. 엄청난 변화인데요, 이걸 당연히 생각하면 무료 폰트를 원망할 수 밖에 없다고 봐요.

하지만 무료 폰트가 하이엔드 스펙으로 개발되고, 그런 흐름이 몇 년 동안 이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죠. 하지만 아직까지는 유료 폰트와 무료 폰트는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무료 폰트는 기업의 브랜딩이 목적이기 때문에 단순 명료해야 합니다. 사용자의 성향을 면밀히 따져 다양한 옵션을 넣기 어려워요. 반면 유료 폰트는 엔트리부터 플래그십까지 다양하죠. 즉 무료 폰트는 기업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유료 폰트는 사용자의 고민을 해결하고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죠.

영상과 달리 인쇄물 제작에 있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익숙해 있는 폰트에서 벗어나 새로운 폰트를 사용하는 시도는 쉽지 않습니다. 

가끔 취업을 앞둔 학생이, 본인이 입사하면 다양한 폰트를 쓰는 분위기로 바꿔보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합니다. 저는 가급적이면 장기적으로 접근하기를 권하는 편입니다. 사람들은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특히 여유가 적을 수록 더 심합니다. 안전한 폰트 몇 개만 돌려쓰고 싶어하죠. 당연히 잘못된 게 아니니 뭐라고 할 것도 아닙니다. 

단지 디자인의 목적이 여러 사람들과의 즐거운 소통이라면 언젠가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거에요. 그게 되야 폰트도 바꿀 수 있는 거죠. 안 바뀌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서 바꾸고 있다고 봐요. 단지 폰트를 바꿀 차례가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지 않는 거죠. 처음 보는 폰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저항감은 불안이예요. 그 불안을 상쇄하려면 꾸준한 노력과 대화가 필요해요. 

저는 북디자인도 하는데요, 몇 년 전에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같은 팀으로 2년 동안 두 달에 한 권씩 12권을 만드는 미션임파서블 같은 프로젝트였어요. 구독 개념이었는데 표지를 두 달에 하나씩 계속 새로 작업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표지를 보여드렸더니 너무 낯설다고 어려워하시더라구요. 그 표지 컨셉이 한 번에 독파되지 않는 글자였거든요. 양측이 팽팽히 맞서 결국 제가 빠지겠다는 말씀까지 드렸는데요, 그때 출판사 쪽에서 제 작업을 들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봐주셨어요. 다행히 좋은 의견을 들었고 진행하게 됐죠. 불안을 해소하려 굉장히 노력하신 거죠. 세 번째 작업부터는 모두가 저를 응원해 주셨고 그 다음부터는 기대해 주셨어요. 결국 잘 마무리됐고 제6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줄여서 말씀드렸지만 거의 4년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기업 폰트 제작을 하셨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저 미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빅테크 기업의 대규모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다국어 폰트 패밀리인데요,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는데 그중에서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폰트 부문을 한국 회사가 통으로 수주한 거예요. 굉장한 사건이죠. 

그걸 어떻게 진행할지 결단이 필요했어요. 저는 스스로 만들어야한다고 강조했고 결국 그렇게 했어요. 간체, 번체 한자를 디자인할 수 있는 한국인 디자이너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런 디자이너가 있어야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만들수 있으니까요. 리스크가 컸지만 결국 메이드 인 코리아로 만들었어요. 외국 디자이너와도 함께 일을 함께 하고 있지만 한국에도 우수한 디자이너가 정말 많습니다. 그만큼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것도 많구요. 

국내 프로젝트로는 단연 배달의 민족입니다. 

▲ 을지로체 [이미지 출처_배달의민족]

그 분들은 일을 굉장히 즐겁게 하세요. 게다가 스스로에겐 엄격해서 상대를 존중하고 책임감 있게 일하십니다. 함게 일하면서 배우는 게 정말 많았어요. 그 중에서도 을지로체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배민 한명수 상무님과 담당자분들, 그리고 저희쪽 팀원들 함께 을지로 지역 투어를 하며 그곳의 이야기를 체험했어요. 

을지로체의 기원은 1960년대 한글 간판 운동입니다. 

을지로체는 그 지역 장인이 쓰셨던 한글 간판체를 바탕으로 만든 거예요. 을지로라는 지역성과 사라져가는 한글 문화를 아카이빙을 하는 굉장히 뜻 깊은 프로젝트였고, 폰트가 드디어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구나 라는 정말 많은 걸 느꼈습니다. 

지난해 어떤 인터뷰에서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영향력이 줄어든 세리프가 다시 주목받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언급하신 걸 봤습니다. 

고딕체라는 이름에는 조롱이 담겨있어요. 

괴기스럽다는 뜻이거든요. 고풍스러운 세리프의 획을 무자비하게 밀어내고 밋밋한 직선 위주의 디자인을 선보이니 천박해 보였던 거죠. 

같은 뜻인 산세리프(Sans Serif)라는 말도 마찬가지에요. sans는 ‘없다’를 뜻하는 프랑스어거든요. 세리프가 기준이고 산세리프는 파생인거죠.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역전된 게 디지털이에요. 저해상도 모니터에는 산세리프의 가독성이 압도적으로 높았거든요. 역사상 유래없던 일이 벌어진 거죠. 

산세리프의 가독성이 높다니! 

디지털 세대들에게는 산세리프가 폰트의 기준이 된 거예요. 무료 폰트도 대부분 산세리프죠. 하지만 산세리프의 붐도 언젠가는 끝나겠죠. 하나의 스타일로 오래 갈 수는 없으니까요.

꼭집어 얘기할 순 없지만 가장 큰 진입 장벽이던 스크린의 해상도가 빠르게 좋아지고 있으니 얼마 남지 않은 거죠. 디지털 폰트 환경은 운영 체제 개발사가 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인 이슈도 있습니다. 이런 족쇄들이 풀리면 왕의 귀환은 시간 문제라고 봅니다. 

컬러 폰트와 베리어블 폰트의 확장 가능성에 대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가능성은 크죠. 먼저 베리어블부터 말씀드리면 베리어블 폰트의 핵심 기술은 이미 1970년대에 나왔습니다. 

이 기술을 폰트로 가져와서 여러 빅테크 기업들이 연구하면서 발전했어요. 2016년 오픈 타입 1.8이 발표되면서 베리어블 폰트의 표준이 공개됩니다. 이 규격대로 만들면 애플, 구글, 어도비, 마이크로소프트 환경에서 잘 쓸 수 있다는 말인거죠. 그 후로 활발히 개발되고 있죠. 

쉽고 재미있게 다양한 효과를 구현할 수 있어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죠. 문제는 모든 환경에서 쓸 수 있는 건 아니어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경우 아래아 한글은 아직 지원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 문제로 봅니다. 

컬러폰트 역시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모지 폰트도 일종의 컬러폰트인데요, 저는 그게 처음 나왔을 때 입력이 이렇게 불편하면 사람들이 안쓸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 예상은 벗어났죠. 

물론 입력 문제가 해결되면 더 활발히 쓸텐데... 하는 생각은 여전히 있습니다. 만약에 입력까지 더 수월해지면 이모지 폰트도 어떻게 될 지 모릅니다. 

아직은 여러가지 제약이 있어 개발이 어렵지만 디지털 폰트도 처음엔 그랬으니 조금 더 지켜봐야겠죠. 

다양한 일을 하시는 만큼,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일단 23년 10월 9일에 6년 동안 쓴 책이 출간됩니다. 

제목은 『글자의 삼번요추—저온숙성 타이포그래피 에세이』입니다. 글자를 만지며 겪은 다양한 이야기를 자전적으로 풀어쓴 책이에요. 

▲ 『글자의 삼번요추—저온숙성 타이포그래피 에세이』 [이미지 제공_심우진 타입 디렉터]

처음 도전하는 대중적인 인문 교양서입니다. 일본 유학 시절 얘기도 있고요, 당연히 한글 이야기도 있고요, 디지털 세대에게는 생경한 타자기 이야기, 디자이너의 세계관 이야기도 넣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디자이너로서 초년과 중년을 되돌아보는 뜻깊은 책이기도 합니다. 

책을 내면 공복 상태를 유지하며 내년을 맞는 게 계획입니다. 굶주린 상태로 희망찬 새해를 맞고 싶거든요. 새롭고 재미난 일도 벌리고, 회사도 조금 더 키워야할 것 같습니다. 기업의 브랜드 폰트 프로젝트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구요, 한글 폰트와 관련된 여러가지 연구도 계획하고 있어요. 

실무와 연구의 균형이 맞아야 자신감이 우러나온다고 보거든요. 프로젝트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고 공유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아요. 

아무튼 한글 환경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일테니 여러분, 많관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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