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계2024.07]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하위문화를 표현,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폰트 - 얼라인타입(aligntype)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간단한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얼라인타입(aligntype)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서체 디자이너 한동훈입니다.
산돌과 티랩에서 폰트 디자이너로 일했습니다. 얼라인타입은 글을 쓰고, 레터링/로고를 만들고, 폰트를 개발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영역을 탐구합니다.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하위문화를 서체로 표현함으로써 사용자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폰트를 만들고 싶습니다. 또한 실무 작업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를 더욱 많은 이에게 전달하는 서체 디자인 교육과 칼럼 작성도 활동의 중요한 축입니다.
폰트 디자인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해서 여러 분야를 탐구하던 중, 서체 디자인 수업을 듣고 적성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헌책방에서 발견한 김진평 선생의 ‘한글의 글자표현’ 속 명조체, 고딕체를 비롯한 여러 견본 도판이 아름답게 여겨졌고, 나도 한번 이런 드로잉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본격적인 서체 디자인에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요소 없이 오직 채워진 공간, 빈 공간으로만 구분되는 서체 디자인은 누구나 쉽게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으며 좋은 것과 나쁜 것도 그만큼 쉽게 구분됩니다. 해석의 여지가 많은 분야보다 그런 명쾌함에 좀 더 끌렸습니다. 또한 폰트는 시각디자인의 근본이고 시작이라는 점에서 한번 직업으로 삼아볼만 하겠다 싶었습니다.
서체 디자인을 위한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받으시나요?
떠올려 보면 용도마다 다른 것 같아요. 클라이언트가 있는 기업 전용 폰트의 경우는 그 기업 혹은 브랜드에 잘 어울리는 이미지나 키워드를 수집하고 핵심이 되는 몇 글자를 먼저 만들어 보면서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편입니다. 꾸준한 소통을 통해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방향을 파악해서 시안을 만들어 보면 어느 쪽으로 진행하는게 좋을지 감이 잡힙니다.
회사 폰트나 개인 작업물은 정해진 특정 클라이언트가 없는 만큼 내부 포트폴리오에서 부족하거나 더 있으면 좋겠다는 영역을 폰트맵을 그려서 시작할 수도 있고, 기존 내부 폰트에서 출발해서 획이나 두께를 변형해서 만들 수도 있죠. 길거리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간판이나 좋아하는 음악, 음식, 특정 사물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형상화하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인기있는 K-POP 그룹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외에도 로만 알파벳이나 한자, 태국 문자, 아랍 문자 등 잘 만든 타 문자 문화권 작업을 보면 이를 한글화하고 싶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듭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에서 영감을 받는 셈입니다.
서체 디자이너로서 보람을 느낄 때와 힘들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아무래도 제가 디자인한 폰트가 각종 매체나 광고 등에서 사용되는 장면을 볼 때가 아닐까요. 그래픽 디자이너가 포스터, 편집물, 방송, 유튜브 등에 잘 적용한 것을 보면 뿌듯합니다. 한글 디자이너로서 최소 2,000자, 최대 11,172자가 넘는 글자를 디자인해야 하는데 처음 10여 자의 시안이 주는 인상이 최종 서체에 그대로 구현된 것을 볼 때도 기분이 좋습니다.
반대로 힘들 때는 서체를 적절하게 쓰지 못했거나 두껍게 혹은 얇게 임의로 만들거나 획의 일부를 자르는 등 변형한 서체를 볼 때입니다. 서체 디자이너가 정해 놓은 최적의 글자폭과 글자 사이가 있는데 이를 비전문가가 변형하면 대부분 좋지 않게 바뀝니다. 또 표절 문제도 서체 디자이너의 의욕을 꺾는 장애물입니다. 윤리 의식이 결여된 일부 디자이너들이 글자 외곽선의 일부 혹은 전부를 따와서 자기가 만든 서체인 것처럼 발표하는 경우가 있는데, 디지털 작업물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런 문제를 완전히 방지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서체 디자인이 주목받으면서 표절인지 아닌지 모호한 케이스도 늘고 있는 만큼 관련 디자이너들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억에 남은 주요 프로젝트가 있다면?
어느 하나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떠오르는 프로젝트 몇 개를 꼽자면 먼저 2021년 회사 재직 시 국립공원공단과 함께 진행했던 국립공원 반달이&꼬미 프로젝트를 들 수 있습니다. 국립공원공단 손글씨 공모전에서 우승한 분의 글씨를 바탕으로 서체로 만드는 작업이었는데, 또박또박 쓴 손글씨와 반달이&꼬미 캐릭터가 잘 어울려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주변에서 귀엽게 만들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클라이언트 미팅을 위해 공단이 있는 원주로 외근을 나가기도 했는데, 관계자분들의 이해와 협조도 원활하게 이뤄져서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회사에서 만든 일반 판매용 서체 중에서는 Tlab사이키델릭과 Tlab부활이 생각납니다. Tlab사이키델릭은 여름, 음악, 스포츠 같은 키워드에서 모티브를 얻은 Inline 서체입니다. Inline 서체는 내부의 빈 공간으로 인해 한 개가 아니라 몇 개의 라인으로 획이 만들어진 서체를 말하는데요, 로만 알파벳에는 적잖게 있지만 한글 서체에선 소수의 경우를 빼면 거의 시도되지 않았습니다. Tlab사이키델릭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환각적인 인상을 추구합니다. 시원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타이틀용으로 쓸 때 빛을 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 밀도가 워낙 높기 때문에 획의 전개는 두 요소가 충돌하지 않도록 평범한 고딕 형태로 만들어 활용성을 높였습니다.
Tlab부활은 대지 위의 획이 이동하고, 꺾이며, 멈추는 등의 흔적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에너지를 시각화한 서체입니다. 온자 전체에서 느껴지는 기울기가 특징이며 자소와 자소 간 결합에도 리듬을 부여하여 생동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래는 어떤 행사에 쓰일 슬로건을 위해 몇 글자만 제작했던 서체인데, 조형적으로 흥미롭다고 생각되어 한글 폰트에 필요한 전체 글자를 개발하여 완성하게 됐습니다.
2023년 방송사 JTBC와 함께 진행한 시즌별 ID 레터링 작업도 좋은 사례입니다. ID란 프로그램 중간마다 방송사의 이름이 송출되는 짧은 화면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를 단조롭게 만들기보다 다양한 그래픽을 담으면 시청자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외부 작가와 협업 시 일러스트레이션은 종종 쓰여도 글자 디자인을 메인으로 하는 ID 작업은 선례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작업물에 대한 클라이언트의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첫번째 새해 기념 레터링부터 삼일절, 현충일, 한글날 등과 마지막 크리스마스 기념 레터링에 이르기까지 즐겁게 마무리했습니다.
디자인 성향과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가 궁금합니다.
서체 디자이너의 성향은 여러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배리어블 폰트나 기타 신기술을 적극 도입하려는 기술 개척자, 최대한 다양한 글자 조형을 탐구하고 선보이려는 조형 개척자, 모바일 폰트나 본문 폰트 등 특정 분야를 중시하는 유형, 곡선이나 직선 등 특정한 디자인을 주로 구사하는 유형 등이 있습니다. 저의 성향을 굳이 분류하자면 보수적인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인상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했던 콘셉트를 완성도 높게 다듬으면서 모임꼴 간 관계와 규칙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을 선호합니다. 최근의 관심사는 한글 모임꼴 별 자간과 글자폭 설정 문제입니다.
서체 디자이너로서 향후 행보에 대한 계획이 있다면?
서체 디자이너로서 가장 가치 있는 목표는 개성 있고 아름다운 디지털 폰트를 꾸준히 출시하는 것입니다. 서체 디자인은 정년이 따로 없고 한 해 한 해 경험이 쌓일 수록 가치 있는 작업을 할 확률이 높아지는 분야입니다. 한글뿐 아니라 모든 문자를 사랑하는 만큼, 앞으로 가능한 한 많은 문자 디자인의 전문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 실무 작업을 통해 얻은 지식을 교육 활동과 저술로 꾸준히 나누고 싶다는 것이 현재의 생각입니다. 서체라는 큰 틀 안에서 ‘베스트셀러보다 스테디셀러’ 라는 자세로 꾸준히 활동하려 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핵심은 ‘글자’, 그리고 ‘재미’를 중점에 두고 작업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주로 저술과 외주 작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기존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하반기에는 고유의 서체를 개발해 판매하고 싶은데, 첫 타자는 명조 계열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모바일 폰트로도 분야를 넓힐 생각입니다. 시안을 만들어 두었지만 완성하지 못한 작업이 많아서 더 늦기 전에 선보이고 싶습니다. 크게 보면 현금 흐름에 지장이 없으면서도 폰트를 지속적으로 개발・출시할 수 있는 생존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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