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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계2024.12] 국내에 처음으로 매킨토시 기반 전자출판시스템이 도입된 과정

_인터뷰_/Fonts & People

by 월간인쇄계 2025. 2. 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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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께서는 강원도에서 군대의 군목으로 계시다가 6·25전쟁이 끝난 뒤 양구에서 목회와 함께 고아원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양구가 나의 고향이 되었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윤디자인의 창업주인 윤영기 대표가 양구 비봉국민학교 동창이다. 내가 반장, 그 친구가 미술부장이었다. 

당시 양구는 춘천까지 버스로 40분 거리에 있었는데, 소양강 댐 공사가 시작되자 양구와 춘천 사이에 있던 내평 마을이 수몰되면서 춘천까지 3시간이나 걸리는 오지가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댐건설 반대 운동을 하셨는데, 정부와 다른 개인의 목소리를 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던 엄혹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라, 자연히 중앙정보부로부터 어려움을 겪으셨던 아버지는 이민을 결심하셨다. 

그렇게 1974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외국에 나가는 일이 흔치 않았던 때여서, 내가 다니던 광성 중학교 2학년 우리반 전원이 김포공항에 배웅을 나왔다. 당시 폐결핵이 많던 한국인들이 미국에 입국하기위해서는 가슴을 찍은 엑스레이 필름을 들고 비행기에 타야했다. 직항비행기가 없어 하와이를 거쳐 갔는데, 2월이라 다들 내복을 입고 있었는데 하와이에 내리니 너무 더워 백여명이 한꺼번에 우루루 화장실에 가서 내복을 갈아 입는 소동을 한바탕 벌였다. 한 손에는 엑스레이 필름을, 다른 한 손에는 갈아 입은 내복 봉지를 들고… 지금의 한국인들 위상과는 너무나 다른 시절이었다.  

나는 1982년 보스턴 MIT를 졸업하기까지 뉴욕에서 목회하신 아버님의 주보를 만드는 일을 시간이 되는대로 도와드렸다. 이 때 활용했던 것이 공병우타자기였다. 하지만 내용물이 저장이 안되는 타자기라 작업이 힘들었다. 내가 보스톤에 있는 동안은 주로 유학생 교인들이 주보를 만들었는데,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일손이 없어 아버지께서 쩔쩔매셨다. 

당시 출시된 것이 왕 연구소라는 회사의 워드프로세스 기기였다. 워드 프로세서만을 위한 컴퓨터였다. 곧이어 IBM PC가 나왔는데, 나는 아버님의 주보 작업을 위해 PC 도스 환경에서 작동하는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전과는 달리 내용 저장이 되어 주보에 설교나 찬송가 제목만 바꾸면 새 주보를 만들 수 있게 하였다. 아버지가 이것을 다른 교회 목사님들께 자랑하시면서, 다른 교회에서도 이걸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자 보스톤에서 공부하던 나에게 목사님들의 문의 전화가 계속되었다. 결국 나는 뉴욕에 이 시스템 관련 기술을 지원하는 회사를 차렸다. 

영문은 아스키 코드라는 256개로 모든 글자를 표현할 수 있는데, 한글은 이보다 훨씬 많은 글자수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한개의 아스키 서체 테이블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당시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방법은 공병우 타자기에서 하듯이 초성 중성 종성을 256의 자리에 배치하고 이것을 자동으로 조합해서 하나의 글자를 완성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글자들은 그리 예쁘지 않았다. 

그때 마침 필라델피아로 이민 오신 공병우 박사님을 뵙고 보다 효율적인 자판 입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한글 두벌식과 세벌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공병우타자기로는 256개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가 없었다. 요즘은 유니코드라는 수 만개의 글자를 저장하는 체계가 있지만 당시 컴퓨터에서는 한글이 전혀 지원되지 않았다. 

공병우타자기[자료출처_e뮤지엄, emuseum.go.kr]

그때 뉴욕에서 한글 편집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한국일보 뉴욕지사였다. 그곳 기자로 일하시던 교회 집사님을 통해서 글씨에 대해서 잘아는 분의 아들이 뉴욕에 이민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찾아갔다. 

8번 애버뉴에서 식품점을 하고 계셨다.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있어서 긴 대화는 불가능했지만, “온자로 해야되”, “사식기 자판을 보면 알아” 라는 말만 되풀이 하셨던 기억이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할 얘기만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온자’란 자주 쓰는 글자는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쪽자’는 자주 사용하지 않은 글자는 조합해서 사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말이었다. 이때 조합은 초성, 중성, 종성을 조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초성과 중성을 만들어 놓고 종성 부분만을 합성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거의 완벽한 글자들을 생성할 수 있었다. 

 

사식기는 사진식자기라는 현미경같이 생긴 기계인데, 주로 글의 제목을 만들기 위해 사용했다. 말 그대로 글자를 사진으로 한자, 한자 찍어서 현상을 하는 기계였다. 이 기계에는 글자가 그려진 여러 개의 유리판이 매끄러운 판 위에 놓여있다. 각각의 유리판에는 서체 별로 약 1500 여개의 글자가 그려져 있다. 사용자는 원하는 글씨체의 유리판과 특정 글자를 렌즈 밑에 맞추어 자리를 배치해 놓고 사진을 찍는다. 서체의 크기는 여러 렌즈를 바꾸어 사용하면서 맞추게 된다. 그리고 이를 현상을 한 후 그 인화지를 가위로 잘라 편집을 했다. 그리고 본문은 납활자나 전산 사식을 이용했다. 그러나 전산사식이나 활판으로는 크기가 큰 글자를 찍을 수가 없어서 사식기을 쓴다고 했다. 

이런 글자들은 주로 샤켄과 모리사와라는 일본 회사에서 한국인들을 고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중 최정호씨라는 분이 이 글자의 대부분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 식품점 주인이 바로 최정호씨의 아들이었다. 우리교회 집사님 왈 사식기 오퍼레이터의 수입이 짭짤해서 한국에서는 약사와 더불어 신부감으로 인기가 좋으니 나보고 한국가면 오퍼레이터와 꼭 선 한번 보라 하면서 자기 친척 중 사식기 찍는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도 했다. 

매킨토시128K

1984년 애플이 매킨토시를 출시하였다. 그 발표회장에 갔었는데, 이전까지의 PC와는 달리 여러 개의 폰트를 다양한 크기로 사용할 수 있었고, 사진도 사용할 수 있었다. PageMaker라는 편집 프로그램이었는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이걸 해야겠다고. 그리고 내가 만들었던 IBM PC용 프로그램을 맥에서 만들기로 했다. 내가 만들었던 서체조합방식을 사용하면 당장이라도 PageMaker에서 한글 입력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바로 매킨토시를 가지고 한국에 나오려고 했지만, 당시 해외에서 만든 컴퓨터를 한국에 들여올 수 없었다. 1987년이 이후 에서야 미국에서 만든 매킨토시를 한국에 수입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노태우 정권이 되면서 전두환 정권에서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졌던 지역 신문사들을 다시 설립 할 수 있게 되었다. 

1987년 미국에서 귀국했다. 미국 출판분야에 매킨토시와 레이저프린터가 몰고 온 DTP(Desk Top Publishing)라는 대변혁을 한국 시장에서 실현해 보고 싶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매킨토시 컴퓨터, 어도비사의 포스트스크립트가 탑재된 출력기, 한글포스트스크립트 서체와 편집 프로그램이었다. 

제록스연구소 출신들이 1982년 어도비(Adobe)를 설립하고 서체를 벡터그래픽으로 표현하고 프린터로 출력하는 언어인 ‘포스트스크립트(Postscipt)’ 기술을 발표했다. 이는 커다란 제목용 글씨도 컴퓨터에서 손쉽게 출력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즉 사식기 오퍼레이터의 직업이 없어지게 됨을 의미하였다. 

이때 어도비사는 자신들의 기술을 잘 적용할 수 있는 폰트가 있는 회사가 필요했었는데, 이 회사가 라이노타입이라는 출력기 회사였다. 당시 어도비는 폰트가 없었기 때문에 라이노타입의 타임즈로만, 헬베티가 등 32개의 라이노타입 폰트를 자연스럽게 포스트스크립트에 기본 탑재하였다. 라이노타입은 포스트스크립트 기술이 탑재된 출력기를 3년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그파와 같은 다른 출력기 회사에서는 포스트스크립트 출력기를 판매할 수가 없었다.

 

미국 LA한국일보사와 연관이 있었던 한국일보사의 자회사인 한국컴퓨그라피사 분들을 만나 매킨토시와 레이저프린터를 보여줬고, 그들의 도움으로 충무로 진양상가에 사무실을 마련해 나중에 신명시스템즈에서 함께 일하게 된 B 상무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이후 삼보컴퓨터에서 파생된 엘렉스사가 애플의 매킨토시 한국대리점을 맡게 되었다. 

[사진제공_김민수 대표]

1987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인쇄기계·재료전시회(KIPES’ 87) 세일포트마 부스에서 맥킨토시와 레이저프린터를 소개했고, 당시 창간을 준비하고 있던 광주 무등일보 관계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서 매킨토시 컴퓨터를 경험하신 신문사 사장님의 지시로 직원분들이 전시장에서 맥킨토시를 찾고 있었는데 나와 만나게 된 것이다. 1987년 언론자유화 조치 이후 1987년에만 23개 일간지가 생길 정도로 언론사들이 많이 생겨났다. 한겨레, 국민일보, 세계일보, 등등.. 을 포함한 많은 일간 신문사와 지방지들이 창간을 했다. 광주 무등일보도 이들 중에 하나였다. 

당시만해도 많은 사람들이 매킨토시로 신문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몇몇 무등일보 직원들은 그래도 미래를 생각해서 맥으로 해야 한다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L(전산담당자)은 자기 직책을 걸고 치열하게 맥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나는 결혼도 하여 오늘까지 한국에서 살게 되었다. 요즘도 그 친구와 만나면 소주 한잔하면서 그때 일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당시 서울시스템, 정주기기 등이 다른 언론사에 IBM PC를 활용한 신문제작시스템을 공급하고 있는 상황에 나는 신명시스템즈를 설립하고 맥 기반의 전자 출판 시스템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하여 무등일보와 조판 시스템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무등일보에서 당연히 폰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포스트스크립트 서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큰일이었다! 계약은 해서 계약금도 받았는데…  

부랴부랴 용산에 있던 디자인 학원에서 학생들을 30여명 고용해서 3교대로 폰터그라프라는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서체를 만들어 갔다. 그게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포스트스크립트 서체였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서체 제작을 해본 경험도 없이 3교대로 작업을 하다보니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당시 무등일보 담당자가 편집국장님에게 결과물을 보여드렸더니, “이거 발로 그렸지?” 했다면서 귀싸대기 맞지 않은게 다행이라고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폰트를 만들게 되었다. 서체 만드는 분들을 초빙해 별도 교육을 받고 고려해야 할 굵기, 삐침 등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다시 폰트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서체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산넘어 산이었다. 라이노타입 고해상도 출력기를 구매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경쟁사라고 라이노타입 국내 대리점을 하고 있던 회사가 우리에게는 출력기를 판매하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직접 영국 대사관을 통해서 영국 라이노타입 본사와 소통을 했고, 마침 한국을 방문하는 라이노타입 마케팅 담당자를 공항에서 바로 만나서 전후 사정을 설명했고, 결국 당시 돈으로 대당 1.5억원에 2대를 구매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걸로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 않았는데신문 한 페이지 출력에 20분 걸릴 정도로 느린 속도가 문제가 되었다. 출력기의 속도는 문제가 없으나 중간에 버퍼 역활을 하는 RIP의 구동 속도가 너무 느린게 문제였다. 그래서 당시 기술정보지에서 호환 RIP들이 출시되는 것을 살펴봤고, 여러 기업들을 섭외하다가 영국에 있는 하이폰이라는 회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알고보니 한국일보에 위즈윅시스템을 납품한 실적이 있는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라이노타입 출력기를 구매한 ‘런던 이브닝 스탠다드’ 신문사에서도 우리가 겪었던 느린 출력 문제가 있었는데 그들이 개발한 RIP으로 해결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출력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었고 문제를 해결하게 됬다.  

또 신문 발행을 위해서는 문화공보부 허가를 받기위한 매킨토시 전자 출판 시스템으로 신문 샘플을 만들어야 했었는데, 페이지메이커 프로그램에서는 가로쓰기만 됐기 때문에 신문의 세로쓰기가 안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됬다. 심각히 고민하던 중, 우연히 폰트와 모니터를 돌리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로 당시는 일반적이었던 세로쓰기로 하기 위해서 폰트를 90도로 돌리는 방법을 사용하여 샘플 제작을 마무리했다. 

이는 미국 애플 본사에서도 관심을 갖는 프로젝트가 되어 샘플 제작 후 애플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 애플 시스템으로 만들어지는 첫 신문의 제작을 위해 연구 중 미국 덴버에 본사를 두고 1년 정도의 개발 기간을 거쳐서 당시 일본어 버전을 출시 준비하고 있던 쿽익스프레스를 만나게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적용하여 1988년 10월 10일 무등일보는 성공적인 창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긴 우여곡절 끝에 무등일보 창간 작업을 마무리했다. 관련 업계에서는 적은 경험으로 컬러 신문을 발행했다는 것 때문에 큰 화제가 되었다. 

그때는 내 머리속에 무등일보일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무등일보 창간날 무등산에 있는 신양파크호텔이라는 곳에서 창간식을 했는데 TV에서 엄청난 불꽃놀이를 하길래 신문 창간기념으로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88 올림픽 폐막식이라고 했다. 하도 정신없이 뛰어나니고 여기저기 날아 다니다 보니 올림픽이 열리는 줄도 몰랐다.  

 

이후 동아출판사를 인수한 두산동아에서 우리와 전자출판시스템을 구축을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당시 두산동아에는 전산실이 있었고 회장님이 전산에 조예가 깊으셨다. 두산동아에서 23명을 모아서 맥킨토시 도입 추진팀 캡스(CAPS)라는 테스크 포스팀을 만들어 전자 출판 시스템 구축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때 여호와의증인이라는 종교 단체 출판 시스템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여호와의증인 출판 시스템은 PC 기반이었는데 IBM부사장이 여호와의증인 신도여서 전자출판시스템을 개발한 것이었다. 선교 목적이었기 때문에 다국어도 잘 되었고, 당시 무등일보 제작 경험만 가지고 있던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좋았다. 

그래서 분위기가 여호와의증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특히 우리 전자출판시스템에는 폰트가 없었는데, 당시 두산동아에는 서체 디자인에 조예가 있는 전문가가 4명이나 있어 자체적으로 23~24종의 폰트를 만들어서 사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시스템 구축 비용을 당시 15억원을 제출했는데, 너무 비싸다고 거절해서 폰트를 신명시스템즈에서 활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결국 7억원에 하는 대신 폰트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SM폰트이다. 그제서야 비로서 쓸만한 매킨토시용 서체가 생겨났던 것 같다. 

또 두산동아 5층 건물에는 밤 10시까지 몇 백 명이 왔다 갔다 하며 일하고 있었는데, 무엇을 하나 봤더니, 필름을 잘라 가지고 이런저런 작업들을 하고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컬러를 보정하는 것이었다. 매킨토시에서는 프린트하면 CMYK가 자동으로 분판이 되어나와 이런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이 되었는데 말이다. 즉, 그때는 분판이라는 게 없어, 색깔마다 수동으로 각도를 틀어서 제대로 색이 나오는 것이었다. 당시 충무로에 제판업체가 3천 여곳이 있었는데, 맥은 이런 과정을 자동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이게 혁명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한 5년 사이에 3천 여개 제판업체가 다 문을 닫고 출력소만 300여개 남았다. 

결국 두산동아 전자출판시스템 구축에서는 여호와의증인을 물리치고 신명시스템즈가 수주하게 되었다. 두산동아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신명시스템즈 내부적으로 폰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뉴욕에 갔을 때, 우연히 뉴욕에서 유학하고 있던 고향친구 윤영기 소장을 만나게 됐고, 서체를 만들라고 이야기해서 윤디자인과 일을 함께 한 계기가 되었다. 

영문 서체는 테이블이 한 테이블로 만들면 되지만, 한글은 2,350자 완성형만 만들더라도 12개의 테이블을 만들어야 했고, 한자까지 하면 그 테이블이 더 많아야 했다. 포스트스크립트에서 초기에는 지원을 안 했기 때문에 이를 프로그램으로 묶어주지 않으면 한글 폰트를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90년대 초에 우리가 개발을 해서 활용했다. 이는 우리가 다른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이후 우리는 ‘엠레이아웃’이란 편집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이는 당시 스티브잡스가 애플에서 나와 넥스트스텝이라는 회사를 차렸을 때 그 OS를 기반으로 개발한 프로그램이다. 넥스트스텝 관계자들과 미팅에서 객체 지향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하는 지금의 앱스토어 개념을 이야기했고, 이걸 활용하면 쿽익스프레스과 같은 프로그램을 금방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품 출시까지 가게 되었다. 

이후 스티브 잡스가 다시 애플로 돌아가게 되고, 넥스트스텝 OS를 맥 OS로 채택을 했다. 우리가 개발한 제품이 맥용이 된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Mac-OS9 때는 기계가 너무 느려서 한글의 서체 너비값을 각각 다르게 할 수 있는 정도의 속도가 나질 않았다. 그래 한글의 모든 글자들의 너비 값이 동일했다. 즉 ‘시’ 라는 글자와 ‘뻬’ 라는 글자너비 값을 동일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영문 서체는 ‘i’ 자와 ‘W’ 가 다른 너비값을 가지고 있다. 아트 디렉터들이 맨날 밤새면서 제목 부분을 한자 한자 당기기를 해야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러나 Mac-OS10 이 발표되던 시기에는 컴퓨터의 속도도 빨라 젓고 새로운 형태의 서체도 등장하게 된다.

그 전까지는 서체가 스크린 폰트하고 출력용 프론트가 두 개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전략은 스크린 폰트는 다 깔아 다 쓰게 하고 포스트스크립트 폰트는 출력소에다가 돈 받고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루타입 폰트(TTF)가 나오면서 이게 화면용으로 사용하던 서체로 출력도 할 수 있게 돼었다, 폰트 회사들이 OS 10용 폰트를 출시를 꺼려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이유로 OS 10용 전환이 지속 되면서 신명시스템즈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사람들은 지금이 인쇄 업계의 위기고, 고사직전이라고들 한다. 인쇄 업계가 다른 매체에 비해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같다. 쉽고 싸게 만들 수 있는 인터넷 컨텐츠에 비해 인쇄물의 편집 과정은 너무 어렵고 비싸게 느껴진다. 인쇄는 굉장히 고급화되고 효율적으로 되어있는데 편집이 병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중이 자기 책을 만들고 싶을 때 제작 공정이 좀 쉽고 저렴해지면 인쇄 시장이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대량의 책 주문 보다 소량 다품종의 출판 시장을 겨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웹 조판을 위한 클라우드 서비스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조만간 찾아뵙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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