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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계2025.10]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맥을 이어나가며, 한글 활자 디자인의 가치를 확장해 나갈 것 - 서울여자대학교 아트앤디자인스쿨 시각디자인전공 민본 교수

_인터뷰_/Fonts & People

by 월간인쇄계 2026. 1. 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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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교수님에 대한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디자인학부 시각디자인전공에서 예술학사를, 스페인 바르셀로나대학교에서 타이포그래피 예술석사를, 영국 레딩대학교에서 타입페이스 디자인 인문학 석사를 마쳤습니다. 이후 애플 본사 디자인팀(휴먼 인터페이스) 디자이너와 폰트팀 서체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애플워치 전용 서체로 시작해 오늘날 애플의 대표 서체가 된 ‘샌프란시스코(SF)’와 ‘뉴욕(NY)’의 디자인을 주도했습니다. 이후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타이포그래피 중심의 교육과 연구를 이어왔습니다.

2025년 1학기부터는 서울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전공 교수로 부임하여, 한글 디자인을 중심으로 보다 구체적인 연구와 교육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글 명조체 활자의 100여 년 역사를 분석하고 이를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으며, 활자 변천사 속 의미 있는 사례들을 폭넓게 탐구하여 연구 성과를 실제 서체로 구현·배포할 계획입니다.

스페인과 영국에서 타이포그래피와 타입페이스디자인 공부를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일본이나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이미 걸어온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남들이 이미 경험한 것을 그대로 반복해서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자신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제가 더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싶었던 분야를 가장 잘 가르쳐줄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스페인과 영국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바르셀로나는 저에게 매우 흥미로운 환경이었습니다. 카탈로니아어가 섞여 있는 독특한 언어 환경 속에서, 현지인들이 외국인이 스페인어에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크게 호의적으로 대해주어 의사소통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바르셀로나대학교에는 수동식 인쇄 장비, 금속 활자 등을 직접 활용해 제판과 인쇄를 체험할 수 있는 워크숍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는데, 이 점이 제가 바르셀로나로 가게 된 큰 동기였습니다.

바르셀로나의 대학원 과정에는 서예 수업이 한 학기 동안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여전히 필사 문화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덕분에 타이포그래피나 그래픽디자인이 기계화·전자화·디지털화되기 이전의 세계를 직접 체험하고 흡수할 수 있었던 점이 무척 소중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모노타입이나 라이노타입 같은 기계식 인쇄 직전 단계의 활자 기술까지 배우는 데 강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후에는 영국 레딩대학교에서는 주로 기계식 활자 문화를 심화해서 익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유럽 전역과 영국 산업혁명의 영향권에 있던 여러 국가의 다국어 타이포그래피를 직접·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미국 애플사에 취업하며 캘리포니아로 넘어가서는 전자식 타이포그래피를 실무 현장에서 경험하며 배울 수 있었습니다.

비록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저 나름대로 궁금했던 것들을 긴 호흡으로 탐구할 수 있었던 값진 배움의 시기였습니다.

시각디자인 안에서 글자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날로그적인 것을 경험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O’라는 글자 하나를 그릴 때, 디지털 환경에서는 좌표와 곡선 값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원으로만 인식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손으로 새기거나 파내면서 생겨나는 날의 흔적, 그로 인해 드리워지는 미세한 그림자를 관찰하는 경험은 전혀 다릅니다. 글자는 본래 표면을 눌러 흔적을 남기는 행위에서 태동한 것이며, 이를 몸소 체험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20대에 이러한 경험을 하고 나서 30대, 40대, 50대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경우와, 단순히 화면 위에서 점을 찍고 원을 그려 ‘O’를 만드는 데 그치는 경우는, 10년·20년·30년 후 지향하는 바와 디자인의 깊이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2011년 처음 시각디자인 관련 강의를 시작했을 때부터 늘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최근 ‘모리사와 타입디자인 공모전 2024’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셨는데요, 오랜 기간 타이포그래피/타입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하고 계신 입장에서 한글분야 신설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심사위원으로서 올해 출품작들에 대해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한글 분야 신설은 업계 전체에 매우 반가운 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각 나라의 언어가 문자로 형상화되는 방식에 늘 큰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한나라 시대 이후 붓으로 글씨를 쓰고 서법을 정리하면서 수많은 문자 체계가 발달해 왔지만, 그 조형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획을 긋고 남은 흔적을 언어라는 틀에서 벗어나 순수한 형상으로 바라보면, 결국 하나의 공통된 미학적 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서체로 히라가나를 쓰든, 정법으로 구양순체를 쓰든,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모리사와에서 활자의 조형을 평가할 때 가나와 한자만을 중심으로 보고, 중국의 한자나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글의 전통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다소 편협한 시각일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번에 한글 분야가 새롭게 마련되면서, 이제는 한자 문화권에 속한 여러 언어가 한 자리에 모여 각자의 전통과 조형을 함께 논의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된 점이 무척 의미 깊게 다가왔습니다. 저 역시 심사 과정에서 그 점을 체감할 수 있었고, 서로 다른 문자와 전통을 존중하는 자리가 열린 것이 무엇보다 뜻깊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자리가 무척 뜻깊었고, 앞으로는 한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도시에서도 비슷한 교류의 장이 생겨나기를 기대합니다. 결국 붓으로 이루어진다는 동일한 원리를 바탕으로 각 문화권의 다양한 형상들이 모이면, 보다 활발한 교류를 통해 빠른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글 부문 심사위원은 저를 포함해 세 분이었는데, 각자의 평가 기준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제가 가장 중점적으로 본 부분은 ‘글꼴 전체의 질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디자이너들은 글자의 획이나 작은 요소들을 다듬는 데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글자를 디자인했을 때, 그것이 모여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글(의) 꼴’의 모습과 그 변화를 의식하며 디테일을 조율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반대로 단순히 획을 뾰족하게, 혹은 둥글게 깎는 식으로 모양 자체를 만지작거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저는 이러한 작품들은 평가에서 거의 배제했고, 결과물 전체를 보며 조율 능력을 보여준 작품에 우선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순위를 가를 때에는 결과물로 드러나는 텍스트의 질감을 특히 주목했습니다. 옷감을 예로 들면 소재마다 고유한 촉감이 있듯, 새로운 ‘질감’을 스스로 개발해낸 작품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고, 조금 특이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익숙하게 접해온 질감을 구현한 작품들은 중간 정도로 평가했습니다.

그 질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제가 말하는 ‘질감’은 옷감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어떤 옷감은 보기만 해도 까끌까끌해서 만지면 피부가 벗겨질 것 같은 질감이 있고, 또 어떤 것은 매우 부드럽고 촘촘합니다. 니트 재질은 굵고 거칠어 보이기도 하고, 어떤 직물은 신축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며, 또 어떤 것은 돌처럼 단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차이는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균질도, 즉 우리가 ‘질감’이라고 부르는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텍스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글은 부드럽고 고른 질감을 지녀서 읽기에 편안하고 가독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광고 카피처럼 강렬하게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경우에는, 일부러 거칠거나 깨지는 듯한 질감을 통해 독자에게 충격을 주는 방식이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특성을 모두 ‘텍스트의 질감’이라고 표현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공모전에서 한글 부문 1위를 차지한 작품은 바로 그 ‘질감’을 스스로 개발하고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활자도서관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활자도서관(Type Reading Room)은 일종의 가상 도서관입니다. 제가 지난 20여 년간 모아온 책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컬렉션을 계속 확장하면서 디자인과 타입디자인에 꼭 필요한 내용들을 선별해 소개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타입디자인 분야는 출간된 전문서적이 많지 않기 때문에, 현재까지 전체 수집 계획의 약 60-70%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정도 더 축적한다면 아시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체계적인 타입디자인 아카이브로 자리잡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근대적 영문 타이포그래피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 영국의 서체 디자이너 에드워드 존스턴과 관련된 20여 권의 책을 모아두었습니다. 각 책을 소개하면서 그의 생애, 작업, 학문적 기여를 함께 설명해주면, 사람들은 그 책을 다시 펼쳤을 때 훨씬 가깝게 느끼고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별 카테고리가 현재 10여 개 구성되어 있고, 연구자들이 필요할 때 다시 찾아볼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또한 활자도서관의 자료를 기반으로 디자이너, 대학원 석‧박사 연구자들과 함께 연 4~6회 워크숍을 열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자료를 이용하고 저와 소통하며 논문이나 글을 쓰도록 돕고, 일정 분량이 쌓이면 이를 묶어 책으로 출판할 계획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바탕으로 실제 서체 디자인 작업도 이어가고 있으며, 첫 결과물인 명조체는 오는 10월 산돌구름을 통해 선보일 예정입니다.

최근 선보이신 ‘새 숨’이라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새 숨’은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 이하 KF)이 주최한 2025년 기획전 '공명하는 문자(Moving Letters)'에 초청작가로 선보인 작품입니다. 지난해 광화문 미디어월에서 전시했던 ‘숨’을 확장한 영상미디어 기반 작업으로, 한글 자모의 조형성과 인공지능의 언어 학습 과정을 타이포그래피 중심의 시각 언어로 풀어낸 타입디자인·AI·시각예술의 하이브리드 작업입니다.

앞으로 AI 시대의 한글 변화를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아, 저는 폰트 디자인에서 라이트와 볼드, 내로우와 와이드 같은 서로 다른 ‘마스터’ 글꼴 사이를 수학적으로 계산해 중간 형태를 생성하는 인터폴레이션 과정에 주목했습니다. 이 변화를 실시간으로 시각화하면 마치 글자가 살아 숨 쉬는 듯한 리듬감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자의 굵기가 변하면서 생기는 리듬을 ‘호흡’에 비유하여, AI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지도록 구성했습니다.

‘새 숨’은 문자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시각예술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입니다. 앞으로는 AI와 타이포그래피를 결합한 인터랙티브 콘텐츠 개발이나 해외 전시 확장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향후 계획에 대해 말씀 부탁 드립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이론적 연구와 실질적 결과물을 서울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전공 교육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활자 교육에 깊이를 더하고, 고(故) 김진평 교수님과 한재준 교수님께서 남기신 학문적 발자취를 이어받아 한글 타이포그래피 연구의 맥을 계승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들과 함께 한글 디자인의 가능성을 더욱 확장해 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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